感性辭典 입동(立冬) 시(詩) 모음 18~26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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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입동 날 가을 들판 / 안영준
다랭이 밭 촘촘히 박아놓은
낱알 하나하나는 간신히 비집고 나와
봄부터 모진 풍파 견디고
땅 냄새 맡으며 새끼도 치고
열심히 잘 살아왔는데
주인장은 그 열매를 아기 때부터
좋아하더니 늙어질 때까지
몽땅 털어가고
몇 가닥 남은 이파리마저도 데친 듯
무서리 맞은 호박 넝쿨은
맥 빠져 축 처져 있다
굴곡진 논이랑에
허리춤이 꽁꽁 묶인 배추는
초라해져 서 있고
뽀얀 하반신을 감추고
서릿발 맞아 떨고 있는
무는 주인장 따스한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입동 날 되자마자
선 듯 오기가 민망했는지
무서리로 경고만 하고
겨울은 재 너머에 머뭇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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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입동(立冬) / 이도연
찬바람이 어스름 불어오는
계절이 오면
어머님의
벙어리 장갑이 생각난다
털실로 한 땀 한 땀
사랑의 코를 꿰어 만든
혹여 한 짝 잃어버릴까
장갑 두 개를 길게 연결하는 것도
잊지 않으신
어머님의 벙어리 장갑
벙어리 장갑속에
꼬물거리고 모여 있는
손가락들
어머님의 사랑으로
서로의 살갗 부비며
겨울을 나던 추억의 그 시절
열 손가락 장갑이 멋있고 편해 보여
세월 지나 끼여 보니
모두가 제각각이더라
좁은 공간 꼬물거리며
모여 살던 그때가
훨씬 따듯 한 것을
세월 지나 알았으니
입동 즈음에
베갯머리
그리움에 눈물만 흐른다

20) 입동(立冬)풍경 / 신창홍
산등성이 윤곽이 실낱처럼 열리면
작은 틈새로 쏟아지는 여명에 실려온
새벽 창밖에 요란한 바람소리
서둘러 도시의 거리로 스며들면
새벽을 여는 바쁜 발걸음들의
움츠러든 어깨에서 묻어나는 한기는
서리 맞은 풀잎으로 세안을 하듯
얼음 같은 냉기가 얼굴을 스치고
일상으로 지나치던 거리의 풍경들은
하루가 다르게 낯설게 변해가고
여기저기서 마른 낙엽 쓸리는 소리가
날카로운 비명처럼 거리에서 서글프다
봄,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끝에서
기억 속에 간직한 소중한 시간들은
아무도 원치 않은 겨울의 길목에서
긴 동면의 망각 속으로 스며들고
메마른 거리에서 느끼는 황량함은
한번 손대면 참기 어려운
완치되지 않는 마른 피부병처럼
스치는 얼굴마다 서늘하게 퍼져간다
21) 입 동 / 김영길
겨울의 첫걸음이란다.
추위가 다가올 날을
예고하는 듯, 한 자릿수
온도가 되니 으스스하고
몸의 활동이 움츠려 든다.
김장 절임배추 주문하고
겨울 오리털 옷도 장롱 속에서
밖으로 나와 외출 준비를
하려 한다.
더위 한 철 장롱 속에서
숨을 쉬기가 고통스러웠는지
밖에 세상을 보니 몸도
부풀어 오르고 풍만한
자태를 자랑하려 하는구나.
세월이 얼마나 빠르게 흘러
가는지 철 따라 옷을 바꾸어
정리하지도 못 한 채
또 새로운 절기를 맞이하는
세상의 돌고 도는 운세 따라
적응하는 훈련이 무척
바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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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입동 / 정태중
빈 들녘이 초췌하다
여름을 지나오면서
뭇 것들의 짝짓기에 소란스러웠지만
벼들이 고개를 숙이며
볕 좋은 날 단두대에 목이 날아가도
겸허히 생을 마감하는 것에 행복해했다
간혹 참새가 지나간 자리에
비둘기 한 마리 날아들지만
이내 다랑논에는 암탉이 헛기침하며
벼 이삭이라도 쫄 듯
발톱을 곧추세우며 뒷발질을 한다
골에는 이미 서리가 내렸고 살얼음이 판을 깔았다
입동이라는 말에 입이 얼고
바싹 마른 나뭇잎 뒤로 사시나무 눈치를 보고
북악산 기와집으로 날아간 비둘기에게
소식이나 물을 참인데
찬바람만 굳게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힌다

23) 입동 / 이성진
이별 이야기는 짧게 하자
가슴 언저리 치미는 못다 한 이야기
바람 따라 흐르는 낙엽에 실어 보내고
한 시절 잘 살다 간다는 붉은 눈물은
남은 자 그리움으로 닦아내면 그만
천금 같은 사랑도
껍데기 같은 외로움도
시절인연으로 뚝 분질러버리고
오들오들 이빨 부딪치며
저 찬란한 나목으로 가는 의식
빠짐없이 속속들이 보자면
더는 무슨 이유나
덧붙임 말 필요하겠는가
부질없는 헛것 모두 털고
장자불와 참선의 길 들어서는데

24) 입동 / 성백군
텅 비었습니다
곡식으로 가득한 황금들녘은
사라지고 추수 끝난 자리에
하얗게 무서리가 내렸습니다
나무들은
한 잎 두 잎 잎을 떨구며
나목이 되어갑니다
대지는
봄, 여름, 가을을 지나오느라
피곤하여 쉬이 곤한 잠이 들었는지
바람이 거칠게 흔들어도
깨어나지 않고 코 고는 소리만 요란합니다
모여
김장을 담그고
남정네들은 독 묻을 땅을 파며
월동 준비를 하고
아이들은 오손도손 화롯가에 둘러앉아
감자며 고구마를 구워 먹었지요
그때 우리는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는데 지금은 모르겠습니다.
잘산다는 게 무엇인지, 그리고
겨울이 왜 와야 하는가를
25) 입동(立冬)인 오늘 / 전병일
겨울의 문턱
서산에 걸쳐있는 만추에
먼 산의 나무들은 옷을 벗어
산 아래로 달려온다
처마 밑에 매달린 곶감은
찬바람에 검붉게 농익어가고
집 모퉁이 소국은 활짝 웃어
물 만난 고기다
행랑채 가마솥에
메주콩 김이 서리고
감나무에 감들은
산까치 불러드린다
만추의 길목
고장도 없이
쉬지 않고 가는 세월
겨울 방 문턱을 넘었다
나목들은 음영의 나이테를 그리고
나도 주름살 하나 더하여
가는 세월 붙잡지 못하고
그냥 그 길 따라서 간다.

26) 입동 / 김미성
영원 할것처럼
내 손 잡아주던 그대는
된서리를 맞고 이별을 고하네요
포근하게 감싸주던
그대의 두 어깨가 그리워 질때면
야속히 불어오는 바람을 뒤로하고
홀로 지새울 날들을
그리움으로 채워 갑니다
한번가면 다시 못 올길
흩어져 내린 무수히 많은 추억
가슴속 책 갈피에 끼우고
조용히 그대의 얼굴을 그려 봅니다
계절에 변화에 민감한 우리는
따뜻한 곳에 눕고 싶고
따뜻한 손을 잡아보고 싶고
따뜻한 마음으로 안고 싶지만
어름장처럼 차가운 바람만이
우리를 감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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